중견가수 김현준이 새 앨범을 내기까지는 꼬박 25년이 걸렸다. 그간 그에게는 정치적인 이유로, 사회적인 이유로 수차례 가수생활에 위기가 찾아왔지만 새로운 도전과 굳은 의지로 다시 일어섰다.
김현준에게 찾아온 위기는 세 번이었다.
그는 1980년 신성일 이영옥 주연의 영화 ‘순자야 문열어라’의 동명의 주제곡으로 데뷔했다. 그러나 인기를 한창 얻을 무렵 12.12사태가 벌어졌고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자신의 노래에 당시 대통령의 영부인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송사들은 지레 ‘순자야 문열어라’를 금지곡으로 선정해버렸고, 김현준은 부랴부랴 ‘사랑의 문으로’로 제목을 바꿨지만 이미 무대를 잃고 말았다.
하지만 김현준은 1982년, 가수 민혜경과 ‘내 인생은 나의 것’을 함께 부르며 다시 유명세를 탔다. 당시 인기 절정의 음악프로그램이던 KBS ‘가요톱텐’에서 4주연속 1위를 하는 등 큰 인기를 얻었지만 ‘청소년들에게 반발심을 유도한다’는 명분으로 금지곡으로 또 다시 묶이고 말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부모나 교사로부터 꾸중이나 잔소리를 듣던 학생들이 ‘내 인생은 나의 것’를 틀어놓고 가출을 하거나 이 같은 말로 자신을 ‘방어’했다고 한다.
이듬해 민해경과 ‘아! 대한민국’을 듀엣으로 부르며 다시 일어서는 듯 했지만, 민해경의 갑작스런 일본진출로 인기가도에서 중도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불운하게도 방송과는 인연이 없었어요. 그래서 다운타운에서 그룹사운드 활동을 했지요. 쉬는 날도 없이 거의 매일 밴드 활동을 했죠.”
그는 갈채, He5(히 파이브), 불새, 신 등의 여러 그룹사운드를 거치며 리더로 활동했다. 당시에는 언더그라운드가 ‘다운타운’으로 불렸다. 2001년에는 미사리 카페로 무대를 옮겼고, 그의 열정적인 무대매너에 반한 팬들은 자생적인 팬클럽을 결성했다. 기존의 미사리 가수들이 기타를 치며 포크송을 불렀던 것에 비해 김현준은 20여년간의 그룹사운드 생활로 다져진 록 공연으로 거대한 아줌마 부대가 생겨났다.
김현준은 애초 트로트가 좋아 가수가 됐다. 고교시절, 전남 목포에서 가수 남진의 공연을 보고 감동을 받아 가수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했다. 당시 ‘여고시절’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작곡한 김영광 씨 사무실에서 기거하며 노래연습을 했다. 무일푼이었던 김현준은 잔심부름과 청소를 하며 월 5만 원인 학원비을 몸으로 ‘때웠다’. 그러다 민혜경 소속사와 연결되면서 가수데뷔를 할 수 있었다.
김현준의 방송활동에 민혜경이 지원사격을 나섰다. 1980년대 환상적인 호흡으로 인해 염문설이 나돌기도 했던 민혜경은 의리파답게 김현준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내 무대를 보면 막혀 있던 가슴이 뻥 뚫린다고 말을 해요. 그간 민혜경과의 듀엣활동 모습만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이번에 나의 진면목을 보게 될 겁니다.”
김현준은 25년 만의 새 앨범을 위해 마경식 윤현성 김준환 등 젊은 뮤지션들과 손을 잡았다. 타이틀곡 ‘친구야’는 J팝 스타일의 편안하고 친근한 멜로디가 단연 돋보이는 포크록으로, 인간미가 묻어나는 김현준의 허스키한 목소리의 매력이 잘 살아 있다. 감미롭고 섬세한 현악기 선율이 돋보이는 ‘고백’, 하림의 하모니카 연주가 구슬픈 ‘사랑을 하면’, 고 김현식을 연상시키는 ‘돌이켜야 하는 마음’ 등은 김현준의 숨은 진가를 확인케 한다.
언더무대에서 관록을 쌓은 김현준은 신세대 가수들과 선의의 경쟁을 벌이게 된다. 그는 젊은 가수와 경쟁에 내심 기대를 걸며 “진면목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아울러 현재 한국의 대중음악계를 위해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유행을 좇지 말고, 장인정신을 가지고 음악을 했으면 해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생각은 하지 말고. 잠자리 안경이 유행이라고, 어울리지도 않는데 쓰면 꼴불견 아닐까요? 자신에게 맞는 것을 했으면 해요. 또 대중가수라면 남녀노소 모두 좋아할 수 있는 음악을 했으면 합니다.”